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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들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들 "개척자들" 송강호

by 조은아빠9 201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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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개척자 전 대표)

양평가는 전철을 타고 국수역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한강은 온통 얼어붙었고, 그위에 눈이 쌓였습니다. 강이 아니라 하얀색 벌판 같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눈썰매를 타고 달렸을 것 같은 장면속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국수역 대합실에서 저를 태우러 올 차를 기다리면 멋진 기차역과 겨울하늘을 담아봅니다.


봉고차를 타고 도착한 “개척자들”의 공동체 집은 낡은 산장을 연상케 합니다. 송강호 전도사님과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무허가 건물이랍니다.(^^;)  이곳에 송강호 전도사님 가정과 이형우 대표님 가정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 아이를 낳은 가정은 동네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이 집은 국내에 살고 있는 “개척자들” 멤버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집입니다. 송강호 전도사님은 신학을 했지만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개척자들의 대

표도 내려놓은 상태라 전도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따뜻한 차를 앞에두고 송강호 대표님의 삶과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사람을 만나게 되면 특히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 진진합니다. 전도사님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고등학교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 짝이 홍성교회 고등부 회장이였습니다. 친구가 설득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때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순간에 사람이 확 변화는 것, 깨우침이나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저 개인에게 소중한 경험이였습니다. 이후 깨우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도 깨우침이라는 논문을 썼고, 유학시절 하이델베르크에서도 회심이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깨우침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대학에서는 처음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좀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알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를 다니던 70년대 말 상황은 군부독재 상황이였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앙과 현실은 너무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에서 기독교 교육과로 전과를 했습니다. 교육은 목회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삶이라서 전과했습니다. 신학과 연을 멀리하려고 연대 대학원에서는 교육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신학과 교육을 오락가락하면서 삶아온 것 같습니다. 

▶평화운동 사역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졸업하고 나서 청소년 감호처분 시설에서 4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길을 잃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길을 잃고 해매고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고 있는 곳에서도 그들만의 판이 있었습니다.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선도하는 방법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와서 용산전자상가에서 학교를 못가고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을 위해 안내자가 되기 위해 작은 사무실을 냈습니다. 학교에서 일탈된 청소년들에게 좋은 친구이자 길을 안내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용산에는 학원가가 있었고 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조립에 미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데이컴의 PC통신에서 자유학교라는 이름으로 동호회를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접속할 수 있는 사람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망이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 효과적인 매체는 아니였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사무실을 운영하하다보니 운영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용산 보광중앙교회에다 이 일을 뒷받침해주면 전도사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청년사역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청년부에서 이형우 대표와 말레지아 국제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광일 등을 만났습니다. 청년들과 시대의 도전에 응답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교회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라 인류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고민하다 전쟁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인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은 전쟁과 기아입니다. 기아는 대부분 내란과 내전과 같은 분쟁사태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분쟁이야 말로 인류가 격는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분쟁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인재입니다. 분쟁지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 때 제가 장학금을 받게 돼서 독일로 유학가게 되었습니다. 93년 9월 유학을 가면서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 가서 상황들을 한 번 들여다 보자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94년 유학중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르완다에 가게 되었습니다. 내전으로 국경이 폐쇄되어 르완다로 갈수 없어서 인접한 부룬디로 가게 되었습니다. 르완다 내전에서 초기에는 투치족의 피해가 컸지만 제가 도착한 94년 6월에는 투치족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도하는 상황이였습니다.  후투족의 난민으로 쏟아져 나오는 까라그외의 난민 캠프촌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강을 따라 몰려 나온 5만명의 후투족 난민이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UN이 최소한의 식량인 콩과 옥수수, 기름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물은 3-4킬로미터 떨어진 늪에서 구해서 밥을 해먹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때약 볕에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물을 실어 나르면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은데 밤마다 모여서 밤새도록 아이와 어른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지가 울릴 정도로 노래를 부렀는데 도데체 무슨 노래를 부르냐고 영어되는 청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노래는 우리나라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매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가 있었는데 어른들이 “후투족의 눈을 뽑아”하고 매기면 아이들이 “잘근잘근 씹어먹세”하고  답하는 노래였습니다. 저는 구전으로 가르치는 증오와 복수의 학교가 밤마다 열리고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난민촌에서는 시간이 오히려 과거로 회기되는 느낌이였습니다. 그 난민촌에선 저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언덕에다 천막을 치고 여러나라 청년들을 모아 우리가 평화를 가르쳐야 겠다는 꿈이였습니다. “애들아 학교가자!” 이렇게 외치면 아이들이 학교로 막 뛰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2000년 이 꿈을 동티모르에서 시작해서 올해로 11년째 여름마다 청년들을 불러모아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아프카니스탄 등에서 평화캠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 단체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있기 마련인데요 “개척자들”에는 어떤 기폭제가 있었나요?

중요한 기폭점이 있었습니다. 93년초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한주에 한 번 가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해에 유학을 떠났는데 98년 12월에 돌아와 보니 기도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도모임이 한주도 안거르고 명절과 관계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WCF로 시작했는데 기도회를 통해 개척자들이 잉태 되었습니다. 

그때 이 일이 하나님이 시키신 거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모임이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일했습니다. 가족들이 당황해 했지만 일하는 소의 입에는 망을 씌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면 어떻게든 먹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9년에 영남신학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때 신학대학의 청년들 6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광교회 청년들과 영남신대 청년들이 함께 모여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쟁지역에 청년들을 파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24인용 미군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겨울에 너무 추워서 짓다 만 건물을 싸게 임대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 청년들이 조금씩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초기부터 외국청년들이 들어왔습니다.  

  

▶ 분쟁지역에 청년들을 파송하기 위해 훈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신걸로 아는데 어떤 훈련을 하나요.

분쟁지역에서 평화캠프를 개최합니다. 그 후 동티모르나 아체에서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장기사역자 배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2,7월달에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보통 2주정도 프로그램을 합니다. 철인3종 경주대회를 하고 있는데 10킬로 뛰고, 20킬로 자전거, 수영으로 강건너 오기를 합니다. 수영은 양평에서 한강을 건넙니다. 분쟁지역에서는 모든 시설이 마비되고 파괴되어 있습니다. 물도 멀리가서 떠와야 됩니다. 저희 단체는 현지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요청합니다. 땅바닥에 비닐깔고 자야 하고 벌레도 나오고 해서 우리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는 평화 활동을 하면 주민들의 삶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안전망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외부사람들이 저희의 안전을 굉장히 염려합니다. 현지 사람을 통해 안전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지인들과 피난을 하는 경우도 현지인들이 피신하는 방식을 따라갑니다. 평화를 만든다는 것이 현지 사람의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무엇일까요? 

저는 한마디로 하면 원래 있었던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평화의 개념을 우리의 사역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현재는 분쟁지역이나 재난지역의 구조활동으로 우리의 사역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재난지역의 구호활동을 사역으로 넣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분쟁지역이 곧 재난상황입니다. 자연 재난 상황도 유사한 점도 많습니다. 논란이 많았는데 할 수 있는데 안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분쟁지역의 평화활동에 대해서는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면 평화의 의미를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다음 단계로 보복을 준비합니다. 그 사슬을 끊는,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복수의 사슬을 끊는 평화교육이 필요합니다. 화해와 상생하는 길을 찾는 평화 교육이 필요합니다. 분쟁 지역의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온순한 사람들을 종교심과 애국심이 광기어린 폭도로 만듭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이 평화사역입니다. 분쟁지역인 동티모르에서 살인하거나 방화를 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살수 없어 난민이 됩니다. 인도네시아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난민이 된 사람들에게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을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본래의 정체성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사를 비디오로 촬영해서 서로 가족에게 보여주고 가족들의 인사를 촬영해 가져와 보여 줍니다. 이러한 활동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서 고향으로 돌아가데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평화 입니다. 


▶ 평화교육과 관련하여 학교교육의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학교에서 평화교육을 어떻게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광명의 가림중학교나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평화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교실보다 교실밖에서 더 잘 가르쳐 질 것 같습니다. 보스니아에서 98년 전쟁이 났을 때 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방문했을때 저는 그곳이 평화에 대한 갈망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학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살과 파괴, 어린아이들이 지뢰로 다리가 잘린 그 현장이 인류에게 있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곳에서 잠을 자다 아이를 잃어버린 꿈을 꾸었습니다.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는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나는 한 밤의 악몽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삶이였습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가 고통당하는데 학생들이 와서 아파하는 환자를 데리고 교육을 시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입니다. 감추고 안보여 주었으면 하는데 어쩔수 없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료교육이 환자에게 부담스러운 것처럼 평화교육도 비슷합니다. 한편으로는 현지인에게 부담이 되고 불편한 것이고 감추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민들에게 부담과 실질적인 도움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평화를 위해 일해야지 하는 의지와 감수성이 이런 현장에서 생깁니다. 모든 청년들이 평화를 위해 2년정도 평화복무를 했으면 합니다. 종교와 관련이 없이 모든 사람이 가능합니다. 저희 단체에는 이슬람 청년도 있습니다. 수년동안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일본대학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동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세계가 학교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분쟁지역으로 끌어들이는 선동가가 되고 싶습니다. 분쟁현실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의 장이 없습니다. 컨트롤이 어렵지만 분쟁현장을 학교로 삶아야 합니다. 일반 학교에서 교육을 하더라고 이런 현장과 접합되어야 합니다.


▶ 여기에 와보니 하는 일은 무시무시한데 왠지 조직적으로는 어설퍼 보입니다. 펀딩을 어떻게 하나요.

적게 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평화운동을 하기 위해 터득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입니다. 가난해야 국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 통하려면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능하도록 체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적은 비용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유재산은 없습니다. 다 용돈을 받아서 삽니다. 의식주는 공동체를 통해 해결해 줍니다. 한국에서는 30만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는 그쪽 지역의 물가를 고려 5만원 정도의 용돈을 받습니다. 1년차든 10년차든, 외국인이든 다 똑같이 받습니다.

매달 천이백만원으로 40명의 식구가 살림을 하고 사역을 합니다. 우리나라 20명이 있고 외국에 20명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습니다. 물론 늘 부족합니다.(^^) 프로젝트로 돈이 들어 온다고 해도 우리는 방어적이 됩니다. 돈을 받는 것에 대해 염려합니다. 과연 컨트롤 할 수 있을까 하구요. 받을건 받고 할 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젊은 친구들은 더 조심하고 심사숙고 합니다. 재정의 50%는 교회에서, 40%는 개인들 10%는 우리가 강의나 된장을 팔아서 구합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20%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호활동은 폐해가 너무 커서 하지 않습니다. 아이티에서 구호활동을 하면서 천만원을 목표했는데 2천만이 들어왔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천만원만 밖에 못 사용했습니다. 구호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난을 격은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아이티의 사람들은 엄청난 재난에서 살아남고 견디는 영웅들입니다. 저희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구호활동으로 인해 한순가에 거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호는 단순히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마음을 증폭시킵니다. 구호활동을 위해 모금을 할 때 가능한 한 불쌍하게 보여야 합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존경해야 합니다.. 몇 킬로를 기어다니는 아이들, 그럼에도 당당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담당함으로 후원을 받아야 합니다. 현지에 있는 사람도 존중받고, 시혜 차원의 우월감으로써 아닌 방식으로 후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너희들이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해야 현지인들이 겸허하게 됩니다. 구호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듭니다. 

현장에서 돈을 잘 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모금의 전문가들을 많지만 현장에서 돈을 잘 사용하는 전문가들은 부족합니다. 개척자들은 구호활동은 조심스럽게 진행합니다. 자신들의 의지를 뒷받침 수준에서 지원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선생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부탁합니다.

밥벌이로 하는 목사님, 밥벌이로 선생님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기있게 내려놓고 행복해 졌으면 합니다. 교사나 목사는 천직입니다. 슈퍼마켙, 세탁소와는 다릅니다. 

정말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진실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학창시절이 지옥같다는 생각을 많이 듭니다. 군대생활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학교다닐 때 형들에게 주워들인 이야기를 가지고 월남이 망한 것은 학생들의 시위때문이 아니라 독재 때문이라고 했다고 엄청나게 맞고 교무실에 가서 교감선생님에게 빨깽이 새끼라는 욕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제가 옳다고 변호해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찾아가고 싶은 선생님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속썩였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무조건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90가까이 되신 분이 직접 이 곳을 찾아 오시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신을 불사를 만큼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삶의 찬미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가르침이 학교에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도사님은 무엇이던 생각하신대로 행동하시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살다보면 제 생각이 틀릴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너무 미래를 걱정하고 계획해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미래가 불분명하지만 올바를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데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보면 새로운 길들이 열립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공동체 식구들과 식사를 나누고 함께 봉고차를 타고 이백회가 넘은 월요기도회를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뷰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난달 아내의 강권에 못이겨 교육공동체를 꾸리기 위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의 빌라로 이사왔습니다. 이번 겨울에 여러번 보일러가 얼고, 눈을 치우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눈길을 걸어 출퇴근 하느라 아내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늦도록 잠들지 않은 아내가 맞아 주길래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개척자들을 만나고 와서 더 이상 저는 불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잠자리에서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우리의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머리고 생각하는 불편함이나 가슴으로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삶으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삶의 단계로 내려와야 하니까요. 하지만, 송전도사님과 개척자의 식구들을 보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조금만이라 그들의 삶에 다가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