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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기교육정책 칼럼

[홍인기 칼럼]청년들이여 ‘고지론’에 속지 마라

by 조은아빠9 2014.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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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여 고지론에 속지 마라

 

성공을 축복으로 이야기하는 많은 기독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가 고지론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넓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논리이다. 나는 기독인들이 고지론을 이야기할 때 이것의 성공을 위한 욕망을 기독교적 명분으로 합리화 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고지론은 한마디로 비성경적이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고지론의 반대 방식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고지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으셨다면 말구유에 태어나시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방식으로 세상이 구원됨을 보여주셨다.

고지론이 비성경적인 이유는 이미 이 실험은 역사를 통해 실패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고지의 끝은 어디일까? 지금은 아마 미국 대통령쯤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제국의 황제들이나 왕들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럽의 모든 왕들을 모두 마음껏 조정할 수 있었던 힘 있던 시절의 교황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황의 허락없이는 왕들이라 할지로도 마음대로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교황은 자신들이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이를 단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배했던 중세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지 않고 중세라고 부른다.

고지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힘 있는 교황의 체제였지만 그 실험은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그러면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왜 주님은 힘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겸손과 희생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셨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다음 세가지 명제를 생각해 보자

-세상은 악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세상에서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

 

세 번째 명제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순탄한 삶이란 내가 그리스도인이 때문에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없거나 직업선택에 자유를 가지지 못하거나 이유없이 감옥에 같이는 수준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직장회식에서 술을 먹지 못해 어려움을 겪거나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이유없는 미움을 받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위의 세가지 명제는 개인의 삶에 따라 각각 사실(True)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가지 명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아래와 같이 바뀐다면 모순이 아닐 수 있다.

 

-세상은 악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다.

-나는 세상에서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

혹은

-세상은 악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세상에서 순탄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세계관은 늘 세상에게는 위협적인 것이 였다. 악한 세상을 향해 성경은 늘 쓴 소리를 쏟아낸다. 그 소리가 세상에는 너무나 불편했기에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이스라엘 안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독생자를 보냈지만 그 독생자를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죽이게 된다.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직장생활에서 승진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그리스도인에게 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특별히 성공을 허락하시여 맡기고 싶은 사명이 있을 경우 벌어지는 특별한 일이다. 따라서 성공이 하니님의 축복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마전 검찰에 대한 사회적인 불신이 붉어졌고 그 중에 검찰 조직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표를 던진 검찰들이 있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자신이 생각한 조직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결토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직의 꼭대기로 가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문제는 알더라도 입밖에 내어서는 안되고 외부로 알리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조직 내부에서 문제제기를 통해 조직이 바뀔 수 있는 조직은 매우 건강한 조직이지만 흔한 조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 내부의 문제를 보고 침묵하면서 때로는 자신이 높은 자리로 가면 이 문제를 개선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침묵을 정당화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침묵하며 조직의 잘못 속에 생활하 되면 고지에 올라도 절대 조직의 근본적인 문제를 개혁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오랜세월 조직의 문제에 침묵하다 보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잘못에 자신이 연류되기 때문이다. 특히 승진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결정권에 대해 조직 전체의 잘못과 역행되는 방식으로 결정권을 행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선택은 두가지 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든지 아니면 자신도 그 문제에 소극적이던 적극적인 방식으로든지 동조하는 것이다. 한번 동조하기 시작하면 더 큰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도 관성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고지에 오르는 과정에서 결국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불의한 방식으로 살아오는 삶에 익숙해지고 그것은 정당화 하는 논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정말 고지에 오르게 되면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자신을 규정짓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지론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실패해 왔다. 기독인지 직업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야 하지만 그 삶을 통해 고지에 오르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은 안된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삶이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그 가르침과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삶이 목표가 되어야 하고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내면이 성화되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목표이다. 고지로 오르기 위해 본직적인 목표와 가치를 버린다면 비록 고지에 오르더라도 더 이상 하나님나라를 확장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만 취하여 능력은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기독청년들에게 부탁합니다. 매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부 어느 순간에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직위와 위치보다는 훨씬 소중한 것을 내 속에 가졌다는 것을 날마다 증명하며 살아야 합니다.